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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

2025/11/14 – 2025/11/25

주최: ウトロ・アートフェスティバル2025実行委員会

제공해주신 텍스트에서 문맥을 고려하여 불필요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줄 바꿈을 제거하고 매끄럽게 정리했습니다.

이번 전시 프로젝트는 태어난 곳을 떠나, 교토·우토로 지역에 삶의 새로운 터전을 일구기 위해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의 이주와 생활을 둘러싼 투쟁으로부터 기획의 모티브를 가져왔다. 전시에는 이주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열어줄 예술작품들이 모인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이주에 관여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지구라는 행성에는 8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중 원래 있던 곳이나 ‘나라’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의 수는 8,900만 명이며, 이들 중 난민이 2,700만 명, 난민 신청자가 460만 명, 국내 피난민이 5,300만 명(UNHCR, 2021~2022년 통계)이다. 즉 이 행성의 89명 중 1명이 이주자인 셈이다. 강요된 이주의 원인은 다양한데, 전쟁이나 내전,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공장 폭발 등 대형사고, 상수원의 화학물질 오염, 인종이나 민족 배척 등의 악정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한 궁핍과 남북 경제의 격차가 확대되면서 이주의 물결이 더 커지고 있다. 또한 이들 통계에는 19세기 후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명백하게 타율적인 이주 외에도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자율적 이주도 많다는 점이 나타난다.

외지에 이동해 사는 일은 1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공유 경험이 되었다. 이러한 이주 경험은 이동한 지역에서의 생활이 출신지와 단절된 「뿌리 뽑힘」과 이주한 지역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의 「뿌리내림」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내고 있다. 거기에는 새로운 공동체로의 길을 개척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를 가로막는 큰 장애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이주는 희망과 고통의 근원이다.

이번 포럼과 아트 페스티벌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일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이주는 물론이고 자율적 이주까지 포함하여 동료를 만들고 삶을 꾸리는 전 세계적 이주 현상이 80억 인구의 지구에서 어떻게 변해왔고 앞으로도 어떻게 변화할지를 묻고, 함께 논의하고 싶다.


물론입니다. 이번 한국어 텍스트에서도 불필요한 번호들을 제거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최지목 작가 정보 (CHOI Jimok)

우토로의 우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설 텐트용 천, 아크릴 래커 스프레이, 종이, 테이프  | 가변 설치(벽과 바닥) | 2025

작가 노트 (Artist’s Note)

 

최지목 작가의 <우토로의 우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는 우토로 공동체가 오랜 기간 동안 직면해 온 심각한 인권 문제를 ‘‘이라는 강력한 은유를 통해 시각화한 작품이다.

우토로 주민들은 폭우가 내릴 때마다 반복되는 수해에 시달렸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조차 지하수를 길어 올려야 하는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왔습니다. 이후 일본 시민 사회의 인권 및 생활 개선 운동을 통해 상수도 인프라가 정비되었으나, 직후 닛산 차체(日産車体)로부터 토지를 매입한 니시니혼 JR 산센(西日本殖産)이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우토로 주민들은 일본의 사법 제도 아래 **’불법 점거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깨끗한 ‘물’은 생존의 문제이자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작품 ‘우토로의 우물’에서는 종이가 물처럼 유동적으로 잘리고 다시 이어 붙여지며 변화를 거듭하는 과정의 흔적이 텐트 천 위에 남아 있습니다. 잘려나간 조각들은 우물에 채워지는 물처럼 다시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룹니다. 이 작품에 적용된 형식은 제가 기존에 다뤄온 주제 중 하나인 ‘내용으로서의 틀(frame as content)‘입니다. 화면을 자르고 교차시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형식은 해체되지만, 동시에 완전히 역전된 새로운 규칙과 틀이 생겨납니다. 이는 단순한 변형이 아닙니다. 내부와 외부, 들여다보기와 밖을 내다보기와 같은 시점을 근본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틀을 재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식민지 시대 전시 동원에 의한 도항, 비행장 건설의 혹독한 노동, ‘함바(飯場)‘라 불린 열악한 거주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旭日旗), 혐한 목소리와 함께 소실된 마을, 재일 코리안의 정체성인 한반도, “우토로에서 살고 죽겠다“고 외친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 이 모든 광경이 천 위에 흔적을 남기고 파도처럼 흘러 하나의 우물로 모여듭니다. 그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장소가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생명을 이어 온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이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피와 땀으로 지켜낸 생존권의 비유입니다.

종이는 잘리고, 모이고, 흘러갑니다. 그 흐름은 단순한 형식적 조작이 아니라, 우토로 주민들이 걸어온 역사와 저항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환기합니다. 이 질문은 과거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유효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기존의 틀 안에서 살고 있으며, 그것에 어떻게 저항하고 재구성해 나갈 수 있을까요?

특별전

우토로 아트 페스티벌 2025 (후기)

제공해주신 텍스트에서 문맥을 고려하여 불필요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줄 바꿈을 제거하고 매끄럽게 정리했습니다.

이번 전시 프로젝트는 태어난 곳을 떠나, 교토·우토로 지역에 삶의 새로운 터전을 일구기 위해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의 이주와 생활을 둘러싼 투쟁으로부터 기획의 모티브를 가져왔다. 전시에는 이주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열어줄 예술작품들이 모인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이주에 관여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지구라는 행성에는 8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중 원래 있던 곳이나 ‘나라’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의 수는 8,900만 명이며, 이들 중 난민이 2,700만 명, 난민 신청자가 460만 명, 국내 피난민이 5,300만 명(UNHCR, 2021~2022년 통계)이다. 즉 이 행성의 89명 중 1명이 이주자인 셈이다. 강요된 이주의 원인은 다양한데, 전쟁이나 내전,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공장 폭발 등 대형사고, 상수원의 화학물질 오염, 인종이나 민족 배척 등의 악정과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한 궁핍과 남북 경제의 격차가 확대되면서 이주의 물결이 더 커지고 있다. 또한 이들 통계에는 19세기 후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명백하게 타율적인 이주 외에도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자율적 이주도 많다는 점이 나타난다.

외지에 이동해 사는 일은 1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공유 경험이 되었다. 이러한 이주 경험은 이동한 지역에서의 생활이 출신지와 단절된 「뿌리 뽑힘」과 이주한 지역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의 「뿌리내림」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내고 있다. 거기에는 새로운 공동체로의 길을 개척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를 가로막는 큰 장애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이주는 희망과 고통의 근원이다.

이번 포럼과 아트 페스티벌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일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이주는 물론이고 자율적 이주까지 포함하여 동료를 만들고 삶을 꾸리는 전 세계적 이주 현상이 80억 인구의 지구에서 어떻게 변해왔고 앞으로도 어떻게 변화할지를 묻고, 함께 논의하고 싶다.


물론입니다. 이번 한국어 텍스트에서도 불필요한 번호들을 제거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최지목 작가 정보 (CHOI Jimok)

우토로의 우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설 텐트용 천, 아크릴 래커 스프레이, 종이, 테이프  | 가변 설치(벽과 바닥) | 2025

작가 노트 (Artist’s Note)

 

최지목 작가의 <우토로의 우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는 우토로 공동체가 오랜 기간 동안 직면해 온 심각한 인권 문제를 ‘‘이라는 강력한 은유를 통해 시각화한 작품이다.

우토로 주민들은 폭우가 내릴 때마다 반복되는 수해에 시달렸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조차 지하수를 길어 올려야 하는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왔습니다. 이후 일본 시민 사회의 인권 및 생활 개선 운동을 통해 상수도 인프라가 정비되었으나, 직후 닛산 차체(日産車体)로부터 토지를 매입한 니시니혼 JR 산센(西日本殖産)이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우토로 주민들은 일본의 사법 제도 아래 **’불법 점거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깨끗한 ‘물’은 생존의 문제이자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상징합니다.

작품 ‘우토로의 우물’에서는 종이가 물처럼 유동적으로 잘리고 다시 이어 붙여지며 변화를 거듭하는 과정의 흔적이 텐트 천 위에 남아 있습니다. 잘려나간 조각들은 우물에 채워지는 물처럼 다시 모여 하나의 형태를 이룹니다. 이 작품에 적용된 형식은 제가 기존에 다뤄온 주제 중 하나인 ‘내용으로서의 틀(frame as content)‘입니다. 화면을 자르고 교차시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형식은 해체되지만, 동시에 완전히 역전된 새로운 규칙과 틀이 생겨납니다. 이는 단순한 변형이 아닙니다. 내부와 외부, 들여다보기와 밖을 내다보기와 같은 시점을 근본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틀을 재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식민지 시대 전시 동원에 의한 도항, 비행장 건설의 혹독한 노동, ‘함바(飯場)‘라 불린 열악한 거주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旭日旗), 혐한 목소리와 함께 소실된 마을, 재일 코리안의 정체성인 한반도, “우토로에서 살고 죽겠다“고 외친 사람들의 끈질긴 저항——. 이 모든 광경이 천 위에 흔적을 남기고 파도처럼 흘러 하나의 우물로 모여듭니다. 그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장소가 아닙니다. 낮은 곳에서 생명을 이어 온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이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피와 땀으로 지켜낸 생존권의 비유입니다.

종이는 잘리고, 모이고, 흘러갑니다. 그 흐름은 단순한 형식적 조작이 아니라, 우토로 주민들이 걸어온 역사와 저항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환기합니다. 이 질문은 과거의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던져진 유효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기존의 틀 안에서 살고 있으며, 그것에 어떻게 저항하고 재구성해 나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