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토로 마을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마을 역사 이야기

우토로 마을의 형성

교토부 우지시 이세타초 우토로 51번지. 이 마을은 1940년부터 일본 정부가 추진한 '교토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함바 터에 형성된 마을입니다.
당시 재일 조선인들은 징용과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행장 건설의 가혹한 노동에 종사했고, 이윽고 일본의 패전으로 공사가 중단되자 그 자리에 일회용품처럼 방치되었습니다.

종전 후 많은 노동자들이 귀국을 희망했지만 일제강점하에서 고향에서의 생활 기반이 파괴되었고 한반도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으며 일본 정부의 재산 반출 제한, 기타 생계 문제 등으로 인해 일본에 머물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들과 가족들은 갈 곳도 없이 스스로의 손으로 불모의 땅을 개척하고 우토로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서로 도우면서 뿌리내리고 살아왔습니다.

해방 후 생활

우토로의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1945년 종전은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이었음과 동시에 실업자로의 전락이기도 했습니다. 우토로 사람들은 가혹한 차별과 빈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토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교육이었습니다. 1945년 9월에 민족학교로서 「조선인연맹 구제분교朝連久世分校」를 개설하여, 식민지 치하에서 빼앗긴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되찾기 위해 민족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학교 역시 1949년에 GHQ(연합국 총사령부)와 일본 정부에 의해 폐쇄됩니다. 대신 인근 공립 학교에 민족 학급의 형태로 존속시키는 등 아이들의 민족 교육을 보장하기 위해 우토로 사람들은 열심히 싸웠습니다.

차별의 상징 우토로 마을

해방 후에도 우토로 마을로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직업과 주거, 생활의 여러 국면에서 차별을 받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우토로 마을은 열악한 생활 환경일지언정 동포들이 서로 도와가며 생활할 수 있는 안전망이기도 했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의 「슬럼」으로 멸시되었던 우토로 마을은 상하수도 등의 생활 인프라가 정비되지 않아 큰 비가 오면 심각한 수해에 고통받았으며, 생활 용수 또한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해야 하는 열악한 위생 환경 속에서 생활이 영위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시민들이 「심각한 인권문제」로 인식하여 우토로 사람들과 힘을 합쳐, 마을의 생활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이 1986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강제 철거 위기

일본 시민들과의 운동에 의해 1988년에 상수도가 부설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우토로 사람들이 모르는 새에 우토로의 토지가 전매되어 매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우토로 마을은 충격에 잠겼습니다.
그 후, 니시니혼식산이라는 회사가 건설 기계와 트럭과 함께 몰려왔습니다. 2차대전 중에 만들어진 국책회사를 인계하여 토지소유자가 된 닛산 차체로부터 토지를 매수한 회사였습니다.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사태는 토지 명도를 둘러싼 소송으로 발전했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에 기인하는 우토로 문제의 본질은 고려되지 않은 채 주민들은 패소하였고, 일본 사법에 의해 「불법점거자」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토로 사람들은 정부와 지자체에 몇 번이고 청원 및 요망을 했지만 대응은 커녕 아무런 답변조차 없었습니다.

우토로 곁을 지킨
일본인 지원자들

1986년 수도문제 때부터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의 일본인 지원자들이 우토로 사람들을 곁에서 뒷받침해 왔습니다. 우토로의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지원자들은 우토로 마당에서 야키니쿠를 하면서 서로 정을 나누고 함께 운동에 힘썼습니다. 「땅 투기 반대!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결성해서 오늘날까지 우토로 지원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재판에 패소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일본인 지원자들은 「마을만들기 계획」을 제안하는가 하면, 해외에도 우토로 문제를 알렸습니다. 2001년에는 유엔 사회규약위원회에서 우토로 퇴거 문제에 관한 우려와 차별 제정 권고를 이끌어내어 우토로 사람들에게 큰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한일 시민사회와 정부 지원

우토로의 호소가 한국에 전달된 2005년, 지구촌동포연대(KIN)를 중심으로 「우토로 국제대책회의」가 결성되어, 우토로의 토지 구입을 위한 시민 모금운동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 정부 역시 지원을 표명하게 되었습니다. 2007년 9월에 우토로 토지 일부를 매수하는 합의서가 체결되었으며, 우토로 사람들은 강제철거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까지 무시 일변도였던 일본 정부와 지자체 역시 한국의 움직임에 따라 2007년말에 「우토로 개선협의회」를 발족시켰습니다. 우토로 마을에서의 새로운 마을만들기가 현실로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설을 향해

우토로의 역사를 기록하여 미래로 이어가는 기념관계획은 2007년 「우토로 마을만들기 플랜」 안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우토로 전체의 마을만들기가 진행됨과 동시에 기념관 계획 역시 진척되었습니다. 우토로 시영주택 제1기동 입주가 시작된 2018년에 한일 시민간에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설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고, 기념관 건설을 위한 한국 정부로부터의 지원금 또한 결정되었습니다.


우토로는 전시에 형성된, 일본 사회로부터 「방치된」 조선인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과 우토로 곁을 지켜 온 일본 시민들, 재일코리안, 그리고 한국 시민들이 협력해서 우토로의 역사와 거주권을 지켜낸 역사는, 일본과 한반도가 서로 이해를 증진하고 힘을 합쳐, 지역 사회에서 「작은 통일」을 만듦으로써 새로운 사회와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토로 평화기념관은 역사를 계승할 뿐만 아니라 우토로 주민들을 비롯한 지역 사람들에게도 열려 있는 커뮤니티의 거점으로서, 지역을 너머 일본과 한반도의 미래를 짊어진 사람들의 만남과 교류가 깊어지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려 합니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 생겨난 우토로라는 지역을 지켜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 함께 살아가기의 의미를 전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